고향에 동영장학재단 설립해 40년 동안 2만 여명에게 150억원 장학금 지원
거친 파도와 싸우며 평생을 보낸 권 회장은 ‘바다에서 번 돈을 고향에 쓰겠다’는 결심 아래 1986년 한국에 수산회사인 ㈜인터불고를 설립했다. 이어 고향 울진에 동영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권 회장은 1986년, 자신의 호를 딴 ‘동영(東榮)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이 장학 재단은 매년 고등학생 2백여 명과 대학생 80여 명, 해외 유학생 10여 명, 중국 조선족과 한족 대학생 300여 명 등 모두 600여 명에게 5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다. 86년 설립부터 작년까지 40년 동안 수혜자는 19,300여 명에 이르며 장학금 규모도 150여 억 원을 지원했다.
권 회장은 1987년에 부산 하사구 장림동에 8천 t급 냉동장공장을 인수하고 3만 2천t급 대형냉동공장으로 증설하는 한편, 대구 파크호텔을 123억 5천만 원에 인수했다. 이어 금호강변을 낀 절벽을 이용해 특 1급 호텔을 짓기로 하고 고모령 주변 과수원과 밭 1만 평을 인수했다. 이밖에 경산과 원주에 골프장을 지었다.
또한 1996년 한국 식품을 유럽에 유통한다는 목적으로 네덜란드에 설립된 한국농수산유통공사의 현지법인 KTDC가 적자 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이를 인수했다.
특히 1997년 한국이 IMF 외환 위기로 대구에서 개최하려던 세계 청소년 체육대회가 국가 재정난으로 취소되는 상황에서 2002년 월드컵 대회 만큼은 철저하게 준비하면서 잘 치르고 싶은 마음에 막대한 돈을 투입했다.
권 회장은 “호텔 부지를 제외하고 건축비만 8백 여억 원이 투입해야 했어요. 800억 원이면 어선 30척을 건조해 연간 8백억~1천억 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어요. 그런데 호텔을 만든다해도 매출 3백억 원을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하지 않으면 2002년 월드컵 예선전의 대구 유치는 어려웠어요. 대구시에서는 저에게 자꾸 호텔을 지으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호텔 인터불고(신관)을 건립하는데 3년의 공사를 거쳐 준공식을 2001년에 가졌다. 구관을 포함하여 총 부지 2만 4천6백 평에 건축면적 3만 1천평으로 객실 360실과 국제회의장 620평 규모 등 지역사회의 랜드마크를 세웠다. 이 덕분에 그가 지은 호텔에서 2002년 월드컵뿐만 아니라 2003년 세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세계 물포럼 대회, 세계 육상대회 선수단 숙소로 사용됐다. 그의 통 큰 투자 덕분에 대구시가 국제대회를 개최한 메가시티로 자리매김하는데 한몫을 담당했다.
권 회장은 호텔의 모든 시설은 스페인풍으로 꾸몄고 로비에는 스페인 문화원을 두어 도서관을 열고 스페인 강좌를 개설하는 등 세련된 유럽 문화와 서비스 노하우를 고향에 이식하는 데 역점을 뒀다. 그는 단순히 건물만 화려하게 짓는 데 그치지 않고 스페인의 인터불고 아카데미를 통해 양성된 인재들을 투입했고, 유럽에서 직접 공수한 식자재와 와인을 선보이며 국내 호텔업계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이 공로로 권 회장과 자녀도 한국에 스페인 문화 전파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스페인 국민훈장을 수상했다.
이어 스페인 북부 갈라시아 지방 항구도시 비고에 ‘골프 리아 데 비고’ CC를 건설했으며 경산에 조성한 27홀 규모의 '인터불고 컨트리클럽(CC)'를 지었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면서도 국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수준 높은 코스를 설계했다.
이 밖에 2011년 대구세계 육상대회 유치도 인터불고 계열사인 스포츠 마케팅(IB) 스포츠에서 한몫을 했다. 이처럼 수산업에서 배운 '치밀한 관리'와 서비스업의 '섬세함'이 결합하자 인터불고는 수산, 유통, 호텔, 골프, 육영사업을 아우르는 종합 그룹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1994년 유엔 해양법 발효로 연안국 수역 진출이 제한되면서 한국원양산업이 쇠락, 운영난을 겪으면서 한국에 투자한 기업들이 자금난을 겪었다. 특히 창업주가 나이를 먹은데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점 때문에 모국에 투자한 기업 경영을 국내 전문가들에게 위임하면서 관리 부실 등으로 그룹 계열사의 상당수가 폐업되거나 매각됐다. 현재 부산 냉동공장과 장학재단은 권 회장이 직접 간여하지만, 한국에서 인터불고 법인으로 사용되는 것은 자신의 기업 정신과 윤리에 맞지 않는 별개의 조직이다.
권 회장은 조국에 투자한 법인의 구조조정을 전문가에게 위임하기보다는 창업한 자신이 직접 사업장을 관리하고 마케팅했었다면 결과를 달라졌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 가난과 무지를 극복하려고 재물을 악착같이 모았지만, 그 모은 재물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장학재단을 만들고 국경의 벽을 허물고 대학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식품공장을 건립해 여기에서 발생한 수익금 전액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을 보람으로 삼고 있다.
국내에선 원양어선 승선 희망자 줄어 중국 조선족 출신 해기사 양성 위해 학과 및 단과대 신설
권영호 회장이 중국의 대외개방 직후 1990년부터 조선족 선원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국내에서 원양어선을 3D 업종으로 인식되면서 배를 타겠다는 희망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족 선원을 모집하기 위해 찾은 지역은 길림성 매하구시(梅河口市) 류하현 동흥촌이었다. 이 지역 조선족 출신 선원들이 많았던 탓에 ‘선원 마을’로 알려졌다. 1995년부터 중국 동포(조선족) 선원을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랜 사회주의적 풍토에 젖었던 탓에 하루에 8시간만 일했다. 그러나 원양 어업의 특성상 하루 12시간, 필요에 따라선 그 이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작업환경이었다. 이들에게 능력을 갖추면 선장과 기관장을 임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동기부여를 심어줬다.
조선족 선원으로 앙골라 어장에 투입한 지 7년 후인 1997년 대성 5호에 조선족 선장과 기관장을 발령 냈다. 이를 계기로 조선족 출신 선장과 기관장은 55명을 비롯하여 항해사 및 기관사는 100여 명에 달하고 1만 명의 선원들이 근무했다.
권 회장은 1995년 여름 홍수 때문에 동흥촌으로 가는 다리가 파괴돼 촌민들이 나들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리 복구비용으로 1만 달러를 지원했다. 또한 동흥촌의 동네 도로가 비포장이어서 비만 오면 주민들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포장 비용으로 5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16년간 꾸준히 지원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지역 촌민들이 도로에 ‘권영호길’이라는 팻말을 달아주었다.
1997년에는 동흥촌 소학교에 교육시설 구입비로 6천 달러를 지원했고 노인협회에 텔레비전과 풍물악기를 기증했다. 그 후에도 동흥촌 조선 경로원과 도로 수리 비용으로 수천 달러를 지원했다.
그는 1996년 10월 길림성 매하구시(梅河口市)에 조선족과 중국인의 건강을 돌보는 비영리법인 동영 병원을 지었다. 또한 1999년 중국 정부와 교섭해 매하구시 직업교육을 전담하는 제2 고급중학교에 항해과 및 기관과를 신설했다. 특히 한국에서 고급선원을 양성할 교사를 파견하고 1만 2천 달러를 들여 어학실습실을 마련했다. 또한 매월 600달러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그는 2002년 9월 길림성 장춘(長春)시 국립 길림대학교에 8백만 달러를 투입해 연건평 3만 3천여 평에 17층 규모의 단과대학 동영학원을 설립했다. 이 학교는 중국 국가교육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스페인 학과와 관광학과 등을 설치했다.
길림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권 회장은 산학 합작으로 ‘장춘 길림대 녹색식품 공장’을 세웠다. 길림대학 측이 제공한 1만 2천㎡의 부지에 IB 그룹이 연건평 9천500㎡, 4천500t의 저장시설과 냉장, 냉동, 가공시설뿐만 아니라 2천㎡의 판매장을 갖춘 최신·최대 식품공장이다. 이 식품 공장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을 4천여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러한 공로로 2005년 중국정부는 그에게 우의상(友誼賞)을 수여했다.
나눔의 철학과 육영 사업, “돈은 벌 때보다 쓸 때가 귀하다”
그는 한국과 스페인,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거대한 인적·물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섰다. 국경을 넘나드는 '인터불고 네트워킹'을 통해 거대한 수산 제국과 화려한 호텔 영토를 일군 권영호 회장의 집무실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는 “내가 번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관리하는 것일 뿐이다”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권 회장의 마드리드 자택은 대지가 800평이며 건평은 100평 정도로 평범한 중산층 주택으로 알려졌다. 가구는 낡았고, 값나가는 집기는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이 집의 방 한 칸에 부인과 함께 사용하고 나머지 방은 인터불고 그룹의 마드리드 사무실과 손님이 찾아오면 방을 내준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던 그에게 돈은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흐름’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마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 환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키우는 일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과 함께 발생하는 이익은 그 지역을 위해 투자하거나, ‘교육’에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는 “선행은 숨기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기부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동기부여를 위해서라도 기부문화를 열린 구조로 조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권 회장은 1993년에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20여 동안 살았던 집을 12만 6000달러를 들여 사들였고 13만 달러의 사재를 투입, 대대적으로 수리한 뒤 기념관으로 보존할 것 등의 조건을 붙여 정부에 기증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받았다.
그는 고향 대구 계명대학교에 대학 발전 기금을 물론 임야 75만 평을 기탁하는 등 단순한 기부를 넘어선 '미래에 대한 투자'였다. 그는 빌딩을 올리는 것보다 사람의 가슴속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 것을 훨씬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그는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교육 분야에 기부를 많이 했다. 그의 열정은 장학금 지급에 머물지 않고 중국 연변대학교에 ‘인터불고 도서관’을 건립하고, 길림대학에 단과대학을 설립하고 아프리카 오지 마을에 학교를 세웠다. 국경을 초월한 그의 육영 사업은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가 없어야 한다"는 자신의 아픈 과거에서 비롯된 결심이었다.
권 회장은 나눔의 영역을 문화교류로도 확장했다. 스페인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에 스페인의 선진 문화를 소개하는 데 사재를 털었다. 이러한 공로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로부터 '이사벨 가톨릭 대훈장'을 수여 받은 것은 그가 보여준 민간 외교의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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