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호 회장님의 삶과 인생 제1막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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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양어업 개척자’, ‘선박왕’, ‘애국가 작곡가인 고 안익태 선생의 스페인 유가(遺家)를 사들여 정부에 기증한 독지가’, ‘폐선 하나로 1조 원의 부를 쌓은 기업인’, ‘유럽 최고의 한상(韓商)’,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인터불고 그룹 회장’, ‘기부 천사’, ‘(재)동영장학재단 설립자’...
울진 죽변 출신으로 다국적 기업의 총수인 인터불고(inter-burgo: 스페인어로 ‘화목한 마을’이라는 뜻) 그룹 권영호 회장에게 따라붙는 각가지 수식어다.
하지만 그는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길을 포기하는 학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재)동영장학재단 설립자’라는 이름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가 장학재단을, 그것도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그룹 계열사가 있는 서울이나 부산, 대구, 원주 등의 대도시가 아닌 울진이라는 아주 작은 시골 고향 마을에 설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 회장이 고향 울진에 (재)동영장학재단을 설립한 것은 1986년.
스페인에서 한국 원양어업 회사 직원 생활을 하던 그가 퇴직금을 몽땅 털어 3만 달러짜리 폐선 한 척을 사 직접 고기잡이에 나선 지 7년 만의 일이다.
목숨을 걸고 대서양과 아프리카 등지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힘들게 번 돈이기에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고 싶었던 권영호 회장.
‘가난 때문에 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고향 후배들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동영장학재단은 지난 35년이란 세월 동안 후학 육성을 위해 100억원이 넘는 거액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기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조 원의 신화
권영호 회장은 울진 죽변 송정마을에서 태어나 평해 거일이라는 작은 어촌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슴 속에 작은 꿈 하나를 갖고 있었다.
바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꼭 바다를 활용해 성공하겠다는 꿈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26세의 나이에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다.
혹독한 선상에서의 생활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고, 그런 그의 성실함이 인정받아 전국 최연소 원양어선 기관장이 됐다.
그리고 기관장 5년 만에 스페인 라스팔마스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됐다.
망망대해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뱃일을 해야 하는 선원들의 입장에서 어쩌면 기관장과 주재원으로서의 근무는 선망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특히 무일푼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던 깡촌 출신 가난한 어부의 아들에게는.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979년 어느 날, 항구에 정박해 있던 낡은 배 한 척이 그의 눈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배는 일본선적으로 수명을 다해 폐선 처리를 위해 대기상태에 있었던 것.
그는 해당 회사를 직접 찾아가 협상을 했다. “배를 나에게 팔면 잡은 고기 전부를 납품하겠다 ”는 조건을 걸고 25만 달러가 넘는 배 값을 10분의 1인 수준인 3만 달러만 주고 인수했다.
배를 판 일본회사조차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고 한다.
“저 낡은 고철덩이의 배로 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하고.
주위 사람들도 모두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의 도전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3달이나 걸린 수리 작업.
마침내 배는 바다로 나갔고, 첫 조업에서 기적과도 같은 ‘만선’이라는 대박을 쳤다.
무려 30만 달러의 어획고를 올린 것.
인터불고 그룹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해 40여척의 거대 선단을 갖게 되면서 ‘대서양 선박왕’이란 타이틀과 함께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가 장학재단 설립을 꿈꿔 왔던 것도 이때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생각하며, 고향의 후학들이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일념에서다.
1986년 잠시 귀국해 고향인 울진에서 장학재단을 설립했고, 당시 100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에게 ‘수업료 전액’을 지원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범위를 대학생들에게까지 확대 했다.
당시 ‘장학금’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울진지역 학생들에게는 그가 지원하는 학비는 학업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위기는 왔다.
바다도 한계가 있었던 것.
원양어업이 붐을 이루면서 수많은 수산회사들이 대서양으로 몰려들었고, 어자원이 고갈되면서 수산업이 위기를 맞았다. 여기에다 입어 조건이 강화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도산하는 선사들도 잇따랐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도 타격이 컸다.
회사가 존망의 기로에 섰지만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장학금을 국내로 송금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아프리카 어장 개척
상황이 이쯤 되자 그는 또한번의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절대 고기를 잡을 수 없다’라는 평가를 받던 폐선을 사서 성공했던 것처럼 ‘위험이 크면 기회가 많다’라는 평소 소신대로 뱃머리를 대서양의 북부어장에서 남쪽으로 돌렸다.
그곳은 아프리카 앙골라 앞바다였다.
권 회장은 앙골라 연안 어장에 조기, 돔, 민어 등이 풍부하고, 산유국이어서 기름값이 싸 어선 운용 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점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앙골라는 내전 상태였기에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의 위험 속에서 사업기회를 포착한 그는 외국기업들이 서둘러 철수할 때 역으로 앙골라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앙골라 어장은 ‘물 반 고기 반’의 황금어장이었고, 출어 때마다 만선의 기쁨을 누렸다.
그는 잡은 고기를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는 등 주민들과 동고동락을 했다.
그의 근성과 끈기는 믿음과 신뢰로 이어져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끝내 앙골라에서도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이후 대통령으로부터도 인증을 받아 명예영사로 임명되었다.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앙골라 대통령이 2001년 초 일본을 방문할 때는 인터불고 측에서 "한국도 방문하는 게 어떤가"라고 권유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웬만한 정치인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아주 가끔씩 가까운 지인들을 만날 때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앙골라 어장은 목숨을 걸고 개척한 것”이라고.
이처럼 원양어업 규모가 커지면서 사업은 자연스레 확대됐다.
고기를 잡는 1차 산업에서 잡은 고기를 보관하는 냉장 냉동사업, 무역업, 건설업, 호텔업, 골프장 등 리조트 사업까지.
그 사업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국내 투자로 이어졌고, 마침내 계열사 20개를 가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야구의 박찬호 선수 메이저리그 국내 중계권을 따내고, 피겨스케이트 요정으로 불리는 김연아 선수가 소속됐던 IB스포츠도 인터불고의 한 계열사였다.
인터불고 그룹 권영호 회장.
무일푼으로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던 한 청년의 이 신화 같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회장님은 자린고비
권영호 회장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는 ‘자린고비’다.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그룹의 총수지만 그에겐 변변한 집무실도, 수행 비서도, 운전기사도 없다. 집무실은 호텔 객실 한 칸을 사용한다. 그가 이용하는 차량도 소형차량이다.
10년 정도 현대차 액셀을 타다 주변에서 하도 ‘차 좀 바꾸라’고 성화여서 바꾼 것이 동급의 기아차 프라이드였다. 직원들은 “회장님 차는 똥차”라고 불렀다.
때문에 임원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그룹 총수가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 상황이다보니 자신들이 중형차를 몰고 다니기가 부담스러워서다.
권 회장과 차, 그리고 청와대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앙골라 대통령이 국빈 방문을 했을 때다. 당시 권 회장은 앙골라 명예 대사를 맡고 있었기에 청와대 만찬에 초청됐다.
청와대에서 회사로 전화가 와서 ‘차 넘버가 어떻게 되나?’, ‘차종은 뭐냐’라는 질문에 직원들이 ‘프라이드’라고 하자 청와대 직원이 ‘프라이드? 프라이드요?’라며 몇 번을 되묻더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커피숍에서 손님들과 차를 마실 때는 개인 돈으로 직접 결재를 할 정도로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다.
그의 자린고비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서울 강남에 있는 그룹 본부 사무실과 호텔이 있는 대구, 그리고 냉동 회사가 있는 부산을 오 갈 때는 주로 열차를 이용한다.
비행기 대신 열차를 이용한 뒤 왕복 차비를 절약하면 쌀 30㎏을 살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4인 가족이 한 달을 먹고 남는 양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즘은 휴대폰 기능이 발달해 연하장을 보내지 않지만 90년대까지 연말연시에 연하장을 주로 보내던 시절에는 연하장을 절대로 스페인에서 직접 한국으로 보내지 않는다.
수천 장에 이르는 우표 값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한국에 오는 사람 편에 연하장을 반입한 후 국내에서 우표를 붙여 안부를 전했다.
해외 출장 때도 비행기는 가장 낮은 등급인 이코노미석만 이용한다.
‘일등석 탄다고 빨리 가는 것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황이주 장학재단 이사장은 “회장님은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계열사 임원 회의에 저를 배석시키시는데 그 자리에서 늘 강조하는 말씀이 ‘먹을 것 아끼고, 필요 없는 곳에 쓰지 않고, 절약해서 내는 것이 동영 장학금이다. 계열사 간부들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장학금이라는 점 항상 명심하라’고 지시를 하신다”고 했다.
◆장학금, 그리고 국경을 넘는 인류애
권영호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업가다.
1986년 장학재단을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100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사업이 잘 될 때는 1년에 6억이나 되는 돈을 울진지역에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호텔 매각 등 회사 운영이 많이 어려운 지금도 장학금 후원은 계속되고 있다.
이 장학금은 울진 출신 대학생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인 영양, 영덕, 봉화, 청송 지역 고등학생들에게까지 지원된다.
권종훈 동영장학대단 이사는 “요즘은 흔한 게 피아노지만, 80년대만 해도 학교에 피아노가 거의 없을 때 권 회장의 지시로 울진군내 각급 학교에 피아노 등 악기와 시청각 기자재 등을 폭넓게 지원해 영덕 등 인근 지역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8년엔 계명대에 시가 200억원이 넘는 임야 243만4500㎡(73만6000평)를 기부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계명문화대학을 찾아 후학양성을 위해 써달라며 1억5천만원을 전달했다.
그의 육영사업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고 해외 동포들에게도 이어져 1994년부터 중국 연변 과학기술대와 길림대의 조선족 대학생 500여명을 선발, 매년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그는 1995년부터 조선족 선원을 채용하고 선장, 기관장을 양성했다.
선원들의 고향 마을에 도로를 내주고 중국 지린대학에 단과대학을 설립했다. 대학 내에 식품공장을 만들어 그 수익금은 전액 장학금에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 마요르카에 있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1906~1965)의 고택을 매입해 한국정부에 기증한 일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진로와 직업’에 선박 하나로 시작해 연매출 1조원의 글로벌 기업을 만든 인물로 소개돼 있다.
팔순을 넘긴 그는 “바다에서 번 돈을 들고 와서 조국에 투자할 때, 그리고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또 동영장학 출신들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 각계각층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울진 죽변 출신으로 다국적 기업의 총수인 인터불고(inter-burgo: 스페인어로 ‘화목한 마을’이라는 뜻) 그룹 권영호 회장에게 따라붙는 각가지 수식어다.
하지만 그는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길을 포기하는 학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재)동영장학재단 설립자’라는 이름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가 장학재단을, 그것도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그룹 계열사가 있는 서울이나 부산, 대구, 원주 등의 대도시가 아닌 울진이라는 아주 작은 시골 고향 마을에 설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 회장이 고향 울진에 (재)동영장학재단을 설립한 것은 1986년.
스페인에서 한국 원양어업 회사 직원 생활을 하던 그가 퇴직금을 몽땅 털어 3만 달러짜리 폐선 한 척을 사 직접 고기잡이에 나선 지 7년 만의 일이다.
목숨을 걸고 대서양과 아프리카 등지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힘들게 번 돈이기에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고 싶었던 권영호 회장.
‘가난 때문에 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고향 후배들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동영장학재단은 지난 35년이란 세월 동안 후학 육성을 위해 100억원이 넘는 거액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기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조 원의 신화
권영호 회장은 울진 죽변 송정마을에서 태어나 평해 거일이라는 작은 어촌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슴 속에 작은 꿈 하나를 갖고 있었다.
바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꼭 바다를 활용해 성공하겠다는 꿈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26세의 나이에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다.
혹독한 선상에서의 생활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고, 그런 그의 성실함이 인정받아 전국 최연소 원양어선 기관장이 됐다.
그리고 기관장 5년 만에 스페인 라스팔마스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됐다.
망망대해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면서 뱃일을 해야 하는 선원들의 입장에서 어쩌면 기관장과 주재원으로서의 근무는 선망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특히 무일푼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던 깡촌 출신 가난한 어부의 아들에게는.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979년 어느 날, 항구에 정박해 있던 낡은 배 한 척이 그의 눈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배는 일본선적으로 수명을 다해 폐선 처리를 위해 대기상태에 있었던 것.
그는 해당 회사를 직접 찾아가 협상을 했다. “배를 나에게 팔면 잡은 고기 전부를 납품하겠다 ”는 조건을 걸고 25만 달러가 넘는 배 값을 10분의 1인 수준인 3만 달러만 주고 인수했다.
배를 판 일본회사조차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고 한다.
“저 낡은 고철덩이의 배로 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하고.
주위 사람들도 모두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의 도전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3달이나 걸린 수리 작업.
마침내 배는 바다로 나갔고, 첫 조업에서 기적과도 같은 ‘만선’이라는 대박을 쳤다.
무려 30만 달러의 어획고를 올린 것.
인터불고 그룹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해 40여척의 거대 선단을 갖게 되면서 ‘대서양 선박왕’이란 타이틀과 함께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가 장학재단 설립을 꿈꿔 왔던 것도 이때다.
자신의 유년시절을 생각하며, 고향의 후학들이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일념에서다.
1986년 잠시 귀국해 고향인 울진에서 장학재단을 설립했고, 당시 100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에게 ‘수업료 전액’을 지원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범위를 대학생들에게까지 확대 했다.
당시 ‘장학금’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울진지역 학생들에게는 그가 지원하는 학비는 학업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위기는 왔다.
바다도 한계가 있었던 것.
원양어업이 붐을 이루면서 수많은 수산회사들이 대서양으로 몰려들었고, 어자원이 고갈되면서 수산업이 위기를 맞았다. 여기에다 입어 조건이 강화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도산하는 선사들도 잇따랐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도 타격이 컸다.
회사가 존망의 기로에 섰지만 그래도 그는 계속해서 장학금을 국내로 송금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아프리카 어장 개척
상황이 이쯤 되자 그는 또한번의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절대 고기를 잡을 수 없다’라는 평가를 받던 폐선을 사서 성공했던 것처럼 ‘위험이 크면 기회가 많다’라는 평소 소신대로 뱃머리를 대서양의 북부어장에서 남쪽으로 돌렸다.
그곳은 아프리카 앙골라 앞바다였다.
권 회장은 앙골라 연안 어장에 조기, 돔, 민어 등이 풍부하고, 산유국이어서 기름값이 싸 어선 운용 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점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앙골라는 내전 상태였기에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의 위험 속에서 사업기회를 포착한 그는 외국기업들이 서둘러 철수할 때 역으로 앙골라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앙골라 어장은 ‘물 반 고기 반’의 황금어장이었고, 출어 때마다 만선의 기쁨을 누렸다.
그는 잡은 고기를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는 등 주민들과 동고동락을 했다.
그의 근성과 끈기는 믿음과 신뢰로 이어져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끝내 앙골라에서도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이후 대통령으로부터도 인증을 받아 명예영사로 임명되었다.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앙골라 대통령이 2001년 초 일본을 방문할 때는 인터불고 측에서 "한국도 방문하는 게 어떤가"라고 권유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웬만한 정치인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아주 가끔씩 가까운 지인들을 만날 때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앙골라 어장은 목숨을 걸고 개척한 것”이라고.
이처럼 원양어업 규모가 커지면서 사업은 자연스레 확대됐다.
고기를 잡는 1차 산업에서 잡은 고기를 보관하는 냉장 냉동사업, 무역업, 건설업, 호텔업, 골프장 등 리조트 사업까지.
그 사업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국내 투자로 이어졌고, 마침내 계열사 20개를 가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야구의 박찬호 선수 메이저리그 국내 중계권을 따내고, 피겨스케이트 요정으로 불리는 김연아 선수가 소속됐던 IB스포츠도 인터불고의 한 계열사였다.
인터불고 그룹 권영호 회장.
무일푼으로 원양어선에 몸을 실었던 한 청년의 이 신화 같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회장님은 자린고비
권영호 회장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는 ‘자린고비’다.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그룹의 총수지만 그에겐 변변한 집무실도, 수행 비서도, 운전기사도 없다. 집무실은 호텔 객실 한 칸을 사용한다. 그가 이용하는 차량도 소형차량이다.
10년 정도 현대차 액셀을 타다 주변에서 하도 ‘차 좀 바꾸라’고 성화여서 바꾼 것이 동급의 기아차 프라이드였다. 직원들은 “회장님 차는 똥차”라고 불렀다.
때문에 임원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그룹 총수가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 상황이다보니 자신들이 중형차를 몰고 다니기가 부담스러워서다.
권 회장과 차, 그리고 청와대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앙골라 대통령이 국빈 방문을 했을 때다. 당시 권 회장은 앙골라 명예 대사를 맡고 있었기에 청와대 만찬에 초청됐다.
청와대에서 회사로 전화가 와서 ‘차 넘버가 어떻게 되나?’, ‘차종은 뭐냐’라는 질문에 직원들이 ‘프라이드’라고 하자 청와대 직원이 ‘프라이드? 프라이드요?’라며 몇 번을 되묻더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커피숍에서 손님들과 차를 마실 때는 개인 돈으로 직접 결재를 할 정도로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다.
그의 자린고비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서울 강남에 있는 그룹 본부 사무실과 호텔이 있는 대구, 그리고 냉동 회사가 있는 부산을 오 갈 때는 주로 열차를 이용한다.
비행기 대신 열차를 이용한 뒤 왕복 차비를 절약하면 쌀 30㎏을 살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4인 가족이 한 달을 먹고 남는 양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즘은 휴대폰 기능이 발달해 연하장을 보내지 않지만 90년대까지 연말연시에 연하장을 주로 보내던 시절에는 연하장을 절대로 스페인에서 직접 한국으로 보내지 않는다.
수천 장에 이르는 우표 값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한국에 오는 사람 편에 연하장을 반입한 후 국내에서 우표를 붙여 안부를 전했다.
해외 출장 때도 비행기는 가장 낮은 등급인 이코노미석만 이용한다.
‘일등석 탄다고 빨리 가는 것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황이주 장학재단 이사장은 “회장님은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계열사 임원 회의에 저를 배석시키시는데 그 자리에서 늘 강조하는 말씀이 ‘먹을 것 아끼고, 필요 없는 곳에 쓰지 않고, 절약해서 내는 것이 동영 장학금이다. 계열사 간부들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장학금이라는 점 항상 명심하라’고 지시를 하신다”고 했다.
◆장학금, 그리고 국경을 넘는 인류애
권영호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업가다.
1986년 장학재단을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100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사업이 잘 될 때는 1년에 6억이나 되는 돈을 울진지역에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호텔 매각 등 회사 운영이 많이 어려운 지금도 장학금 후원은 계속되고 있다.
이 장학금은 울진 출신 대학생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인 영양, 영덕, 봉화, 청송 지역 고등학생들에게까지 지원된다.
권종훈 동영장학대단 이사는 “요즘은 흔한 게 피아노지만, 80년대만 해도 학교에 피아노가 거의 없을 때 권 회장의 지시로 울진군내 각급 학교에 피아노 등 악기와 시청각 기자재 등을 폭넓게 지원해 영덕 등 인근 지역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8년엔 계명대에 시가 200억원이 넘는 임야 243만4500㎡(73만6000평)를 기부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계명문화대학을 찾아 후학양성을 위해 써달라며 1억5천만원을 전달했다.
그의 육영사업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고 해외 동포들에게도 이어져 1994년부터 중국 연변 과학기술대와 길림대의 조선족 대학생 500여명을 선발, 매년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그는 1995년부터 조선족 선원을 채용하고 선장, 기관장을 양성했다.
선원들의 고향 마을에 도로를 내주고 중국 지린대학에 단과대학을 설립했다. 대학 내에 식품공장을 만들어 그 수익금은 전액 장학금에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 마요르카에 있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1906~1965)의 고택을 매입해 한국정부에 기증한 일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진로와 직업’에 선박 하나로 시작해 연매출 1조원의 글로벌 기업을 만든 인물로 소개돼 있다.
팔순을 넘긴 그는 “바다에서 번 돈을 들고 와서 조국에 투자할 때, 그리고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또 동영장학 출신들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 각계각층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