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대부로 불리는 권영호(85) 인터불고 그룹 회장은 회사의 구성원들이 마음과 뜻을 모아 화목하게 일하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업가정신을 갖고 있다. 5달러로 한때 5억 달러로 벌어들인 권영호 회장은 ”운(運)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고, 성공은 나눈 자에게만 머문다”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혁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대서양의 거친 풍랑 속에서 불굴의 도전 정신과 “열매를 얻은 곳에 씨앗을 뿌려라”는 나눔의 철학으로 기업의 사회 환원을 실천한 거인(巨人)이다. 권영호 회장은 2025년 9월에 제10회 장보고한상 어워드 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 글로벌비즈뉴스(GBN)은 드라마틱한 글로벌 경영을 펼친 권영호 회장의 창업 성공스토리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가난이 싫어 가출해 최연소 기관장 승선 ... 라스팔마스 주재관으로 근무 중 폐선 구입, 수리해 출항해 만선(滿船)
경북 울진군 죽변읍의 한 어촌에서 1940년에 태어난 권영호 회장은 10세 때 고기 잡으러 나간 아버지를 바다에서 잃었다. 이 때문에 그에게 한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바다에서 성공하겠다는 어렸을 때의 꿈을 20대부터 성취했다.
그는 지독한 가난이 싫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출하여 부산에서 주경야독으로 고입 및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20세에 결혼 직후 카투사로 부산 제3부두 주둔한 미(美) 병참부대 수송부에서 근무하면서 부대장의 허락을 받아 1962년에 동아대학교 영문학과(야간학부)에 입학, 1969년에 졸업했다.
1960년대 국책기업으로 한국수산개발공사가 설립, 원양 개척으로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소문을 듣고 고급선원 연수과정을 거쳐 을종 1등 기관사의 면허를 취득했으며 1998년에 을종 기관장 면허를 땄다.
그는 26세에 한국수산개발공사 해기사 모집에 지원서류를 제출해 채용되면서 최연소 기관장으로 남해호 252호에 승선했다. 이 선박은 아프리카 중부 몬로비아에 기지를 두고 대서양에서 조업을 했다. 그는 이때 선박용 디젤엔진을 다뤄본 경험이 없었지만 영어로 된 매뉴얼을 충실하게 익혔다. 또한 숙련된 기관사들이 하는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디젤 엔진 기술을 습득했다.
당시 대형어선을 운항할 만한 해기사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림수산이 대일차관으로 일본에서 건조한 800t급 선미식 트롤선 대진호에 승선을 희망하는 기관장들이 많았지만, 이들 모두 물리치고 권 회장이 취직해 승선했다. 그는 태평양을 지나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카리브해를 경유 대서양까지 50일의 항해 끝에 1968년 스페인령 카라리아제도 라스팔마스항에 입항했다.
라스팔마스는 지리적으로 서아프리카 상단 모로코와 서사하라 중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항로의 선박 보급기지의 역할을 했다. 특히 이곳은 북부 아프리카의 사하라 어장과 인접했다. 이 어장은 아무 곳이나 그물을 던져도 고기를 가득 잡을 정도로 ‘황금 어장’으로 유명했다.
라스팔마스는 한국 원양어업 역사가 서린 곳이다. 1966년 한국수산개발공사 소속 원양어선이 최초로 입항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조업하는 한국 원양어선이 250여 척에 달했으며 70년대 말까지 라스팔마스 원양어업이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는 약 2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파독 광부 및 간호사들의 고국 송금액의 1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라스팔마스 한인사회는 많을 때는 교민이 3~4천 명에 이르고 해상에는 1만 명이 근무할 정도였다.
그는 미군 병참 부대 근무하면서 각종 장비를 수리하는데 손에 익혀 있었던 덕분에 대진호 선내의 모든 기기는 물론, 항해실의 레이다 및 어군탐지기, 통신장비까지 고장이 나면 밤을 새워서라도 수리를 마쳤다. 특히 좁은 기관실에 박혀 해도를 연구하고, 스페인어 단어를 외우며 세계 수산업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았던 그를 보고 동료들 사이에서는 '독종'이라 불렸다.
그가 2년 승선하는 동안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불필요한 지출을 하지 않는 등 월급을 모아서 450만 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었다. 이 돈으로 고향에 상답 논 100마지기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이처럼 그는 앞으로 자신의 '원양어선'을 소유할 꿈을 꾸며 구두쇠처럼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당시 원양어업은 돈벌이가 가장 빠른 산업으로 부상했다. 대림수산은 10여 척의 선박을 증강해 사하라 어장에서 승부를 걸 작정으로 선박 실무에 밝은 인재를 라스팔마스 기지에 투입하려고 권영호를 1972년 기관장에서 주재원으로 발탁했다. 그는 이때 가족들을 스페인으로 이주, 현재까지 살고 있다.
권 회장은 대림수산 기지 주재원 생활 8년 동안 밤낮 기름때투성이의 작업복 차림으로 부두를 지키면서 대림수산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선박에 대해서도 대가 없이 수리를 해주거나 기술고문에 응했다. 이러한 공로로 한국원양협회가 발족한 후 최초의 공로상을 수상했다.
권 회장은 스페인령 라스팔마스 기지에 근무한 선원들이 병원진료를 받을 때에 예상 문답과 의약 용어를 정리한 한글 대역 스페인어 책자를 만들어 현지 동포에 배포했다. 이 때문에 라스팔마스에 살던 한국 사람치곤 권영호 차장의 도움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권 회장은 1979년 기름값 폭등과 선원 확보난으로 대서양 어장을 철수하던 일본 회사의 폐선(299톤)을 고철값에 해당되는 2만5천불에 구입했다. 일본 회사 장부가격은 39만불이었는데, 권 회장의 수중에는 2만5천불 밖에 없었다. 그는 고기를 잡으면 전량 선주사에게 매각한다는 약속을 한 뒤 매입했던 것이다. 그는 3개월 수리 작업 끝에 원양어선 대성호로 출어한 결과, 31만 5백 달러의 어획고를 올려 배값을 치렀다.
권 회장은 자기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2년 만에 4척의 선대를 보유한 파나마법인 인터불고를 설립했다. 그는 한때 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에서 조업한 원양어선 45척(2만 t)의 정예 선대를 보유하고 전 세계 22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세계적인 굴지의 그룹으로 발전시켰다. 이 때문에 21세기 태평양 장보고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대서양 장보고는 권영호 인터불고그룹 회장으로 회자되었다. 라스팔마스 항구 사람들은 동양에서 온 이 젊은 사업가를 가리켜 '지중해의 젊은 사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사용하고 있는 권영호 회장의 신분증. 이는 스페인 정부가 이때까지 장수라는 작은 배려인데, '돈키호테'로 대표되는 스페인 사람들의 문학적 위트가 숨어 있음을 알수 있다.
고물 중고선으로 앙골라 어장에서 부의 신화를 쓰다
그가 원양어업에 발을 들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4차 중동전쟁과 이란혁명 등으로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 무기화 정책을 고수하면서 기름값이 폭등하고 어획량이 줄어 도산 위기에 처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년간 원양어선의 기관장으로 근무하면서 현지 어민들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선원들을 다스리는 법과 그들의 문화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회사 경영에 어렵더라도 직원들의 임금은 한 번도 밀리지 않고 지급했고 거래처와의 약속은 손해를 보더라도 반드시 지켰다. 그는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신용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라는 속담을 생명처럼 지켰다. 그 결과, 까다롭기로 유명한 스페인 은행들이 담보 없이 그의 이름 석 자만 보고 대출을 승인해 준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훗날 인터불고가 스페인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사하라 어장이 황폐화되면서 회사 경영은 힘들었다. 그 잘나가던 사하라 어장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았던 것은 무분별한 산림 벌목과 경작 확장으로 사하라 사막이 매년 남쪽으로 5~6km씩 확장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흙먼지가 대서양으로 날아들면서 세균과 곰팡이가 바다로 유입되면서 '산소 고갈' 및 '해수 산성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닷물이 뜨거워지면서 해수온 상승 및 지구 온난화, 무분별한 남획으로 어획량이 줄면서 대다수의 원양업체들이 심각한 불황의 늪에 빠졌다.
권 회장은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가절감과 새로운 어장을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직접 배에 승선했다. 그는 ‘위험한 곳에 돈이 있다’라는 상훈(商訓)에 따라 주(駐) 라스팔마스 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앙골라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982년 6월 22일 중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앙골라와 입어계약을 체결했다. 당시만 해도 앙골라는 한국 원양 회사들이 가장 꺼렸던 나라였다. 그 이유는 게다가 라스팔마스로부터 어장까지 15일 걸리는 데다가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해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며 북한의 동맹국이며 좌·우파 간의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리스크가 많은 나라였다.
그가 위험을 무릎 쓰고 진출한 앙골라 어장은 ‘바다의 노다지’였다. 그 이유는 일본 원양어선으로부터 입수한 ‘앙골라 어장도’의 덕분이었다. 이 지도는 고기를 많이 잡은 포인트에서부터 암초 및 해초와 플랑크톤 서식지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보물지도의 역할을 했다.
특히 앙골라 어장에 서식하는 주요 어종은 일본인들이 결혼식 피로연 할 때 내놓은 ‘렌코다이’(れんこだい: 황돔)로, 일반 돔보다 40~50% 비싼 가격에 거래됐다. 즉, 원양어선 1척의 어획고가 하루 평균 25t씩, 한 항차(약 2개월)마다 약 1백만 달러의 노다지를 캤을 정도로 천문학적인 매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방해가 있다(好事多魔)’고 했던가. 양적 질적으로 월등한 실적을 올리고 있을 때 북한 대사관에서 앙골라 정부에 한국어선을 철수시키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유는 앙골라 선대에 북한 선원을 승선시키고 있는데, 그 어획량이 권 회장의 실적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골라 정부는 이념보다 경제를 우선시했던 방침에 따라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그는 낮에는 정부군과 협상하고 밤에는 반란군과 교섭하면서 억척스럽게 앙골라 어장에서 고기를 잡았다. 한때 앙골라 수도 루안다의 일부가 반군에 점령되자, 외국인들은 모두 피난을 떠나고 타국 어선들이 입항을 포기하자, 앙골라 수산청장이 권 회장에게 “굶주림 문제 해결이 시급하니 배를 돌려 고기를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권 회장은 앙골라 어장에서 조업하던 어선에 지시하여 순서대로 입항하여 고기를 하역하라고 지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이 전쟁하는 나라에 입항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에 앙골라 수산장관이 위험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약속을 받고 수십척이 입항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앙골라 사람들에게 고기를 무료로 나눠줬다. 앙골라 정부는 이러한 공을 참작하여 추가로 인터불고 선박들이 많이 조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권 회장의 어선이 입항할 때면 앙골라인들이 부두로 나와 그를 향해 “아버지, 고기 아버지”라 외쳤을 때 감동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권 회장이 앙골라인들과 인간적인 교감을 가진 사례는 수산장관 관사에 근무하던 10살 정도 되는 도우미의 발바닥이 상처로 피고름이 흘리는 상황에서 권 회장이 상처부위를 입으로 짜내며 치료하는 광경을 주인이 목격했다. 감동을 받은 장관은 나중에 법을 제정, 인터불고가 현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줬다. 그는 진정으로 앙골라인들과 인간적인 교감을 가졌고 그 덕분에 앙골라인들을 직원으로 많이 채용했다.
아프리카를 매료시킨 'K-수산'... 수산업 수직 계열화 성공
권영호 회장은 내전으로 정국이 불안한 앙골라와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서부 연안의 어장을 개척할 때 총성이 들리는 해안가에서 현지 관리들을 만나고 어장을 조사했다.
이들 해역에서 어장을 개척할 때 권 회장의 무기는 ‘진심’ 뿐이었다. 그는 단순히 고기를 잡아가는 탈취자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일자리를 만들고 기술을 전수하는 파트너로서 다가갔다. 그는 "우리가 잡는 것은 고기만이 아니다. 현지인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며 상생 철학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이를 위해 어려운 아프리카인들을 돕기 위해 구호물자를 마련하여 전역에 지원했다. 이 공로로 한국적십자사로부터 2회의 표창장을 받았다.
1992년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섬에 유일한 선박수리조선소가 운영위기를 맞고 있으니까, 이를 한국원양협회에서 인수해달라고 했으나, 원양협회에서는 조선소를 구매할 여건도 되지 않는다며 권영호 회장한테 인수를 해달라는 간청을 했다. 이에 인터불고가 그 수리조선소를 인수해 수십년 동안 근로자들을 고용하고 지역경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 인수로 인터불고는 경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의 철학은 '있는 곳에 따라 주인이 되자(수처작주 (隨處作主) 그러면 서 있는 곳 모두가 참된 것이다(입처개진 立處皆眞)'라는 좌우명을 실천한 것이다.
이 때 인수한 수리조선소는 총연면적 4만㎡에 2천t급 선박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도크 시설과 한꺼번에 13척의 배를 수리할 수 있는 파킹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스페인 직원만 70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앙골라 수산장관이 “스페인 앙골라 어업협정에 의거 5년 전 스페인의 비고항 조선소에서 300t급 어선 7척을 건조했는데, 예산 부족으로 인수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인터불고가 그 배들을 인수, 운영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앙골라 해역에는 소련과 폴란드, 쿠바, 스페인, 이탈리아, 한국 등의 원양어 선대와 앙골라 국가의 소규모 선박들이 조업을 하고 있었다. 권 회장이 거느린 선단은 30여 척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어자원의 감소와 현지 입어 조건이 까다로워진데다 사소한 위반사건에도 수백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거나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선박을 수 개월간 압류했기 때문에 인터불고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앙골라 수산장관의 제의를 수락했다.
1991년 앙골라에 현지 유력자와 합작으로 수산회사를 설립한 덕분에 1년 뒤에 한국-앙골라는 수교했다. 앙골라 정부는 권 회장이 땀을 흘리며 고기를 잡는 근면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국민기업으로 키우는 그의 노력를 치하하면서 그를 ‘앙골라 명예영사’로 임명했다.
그는 앙골라 정부의 요청으로 해군이 운영하던 낡은 호텔을 인수해 리모델링 공사에 참여했다가 현지 노동자가 무심코 동력 스위치를 작동해 그의 왼손이 벨트에 말려 들어가는 안전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권 회장의 왼손 인지와 중지,새끼 손가락의 끝부분을 절단했다.
그는 “지도가 없으면 길을 만들고, 어장이 없으면 바다를 열어라.”라는 좌우명으로 ‘잡는 어업’에서 ‘유통하는 산업’으로 수산업의 혁명을 달성했다. 그는 한국인의 근면함과 유럽의 합리성을 접목하면서 “단순히 잡은 고기를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공과 유통망을 직접 참여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터득했다.
그는 아프리카 현지에 대규모 냉동 창고를 짓고, 잡은 수산물을 즉시 가공해 유럽 전역으로 수출하는 '수직 계열화' 시스템을 구축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잡힌 생선이 유럽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복잡한 유통망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인터불고의 운반선들이 대서양을 가로질러 신선한 고기를 공급하면서 유럽인의 입맛을 사로잡자,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른바 'K-수산'의 효율성이 유럽 시장을 강타했다.
앙골라 정부는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그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부여했고, 그는 현지에서 대통령에 준하는 국빈 대접을 받았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서 대우를 받은 게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원하며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간 '진정성'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는 대륙과 대륙을 잇고, 전통 어업과 현대 산업을 결합한 글로벌 수산 제국의 황제로 명성을 날렸다.(이어 제2부로 계속됩니다)
출처 : 글로벌 비즈 뉴스(
http://www.gb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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